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사수도 동료도 없는 스타트업 1인 디자이너란

223page.kr 2020. 12. 25. 00:07

스타트업 인하우스 1인 디자이너로 일한지 어느덧 1년 4개월째다. 아예 모든 작업을 혼자 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80-90퍼센트는 혼자 한 것 같다. 스타트업 1인 디자이너로서 겪었던 일들을 기록해두려 한다.

첫 고비는 입사 3개월차에 디자인 외주와 함께 작업한 적이 있었는데, 웹디자인+BI를 그쪽에서 1차적으로 잡아주고 내가 디벨롭을 하려고 했었다. 그 곳은 나름 스타트업 위주로 작업하는 에이전시였고 상사와 잘 아는 사이라고 해서 믿고 맡겼는데 문제는 그 에이전시가 온라인 디자인은 해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. 잘 모르지만 굳이 도전 해보고 싶다고 밀어 붙여서 같이 하게 된 거라고 했다. 역시나 결과물은 웹에 전혀 맞지 않는 디자인이 나왔고 차마 이렇게는 진행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조치를 취해야 했다.

당시의 나

돈 주고 받은 작업물을, 심지어 아는 사이인 곳인데 신입 디자이너가 바꿔야 한다는 게 참 어려웠다. 다행히도 다른 분의 도움으로 그 곳에서 준 디자인을 왜 바꿔야 하는지 어떻게 바꿀 건지 보여드릴 피티 준비를 할 수 있었다. 성공적으로 피티를 마쳤고, 덕분에 이 사건이 후에 디자인 방향성을 내가 하고싶은 쪽으로 끌고 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.

분명 좋은 계기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부담감도 커졌다. 내 입으로 디자인을 바꾸자고 했으니 그만한 결과를 만들어내야 했다. 책임을 온전히 내가 지는 건 아니었지만, 어쨌든 작업은 나 혼자 하는 거니 시간이 갈 수록 힘들어졌다. 어느 순간 한계에 부딪혔고 내 디자인에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. 동시에 UX에 대해서 공부를 시작하면서 사용자에게 편한 디자인과 심미적으로 충족되는 디자인 사이에서 고민하며 내 디자인의 스펙트럼이 점점 좁아지는 느낌이었다. 그렇게 고민을 끝내지 못한 채 beta버전 디자인이 나오게 되었다.

몇 개월 뒤, 경력이 빵빵하신 기획자 한 분이 영입되고 그 분의 피드백을 바탕으로 beta버전 디자인을 기반으로 정식버전 디자인을 시작했다. 이전에는 와이어프레임과 디자인의 경계가 거의 없었는데, 기획자에게 화면상세설계 기획서를 받아 상세한 와이어프레임을 바탕으로 디자인을 하게 되었다. 스타트업에서 이렇게 정식으로 단계를 밟으면서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와이어프레임을 바탕으로 UX에 대한 고민도 깊게 해보고 정말 좋은 경험이었다. 덕분에 디자인도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었고 많이 배울 수 있었다.

하지만 스타트업은 상황이 시시때때로 바뀐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. 1년이 조금 넘는 기간동안 한 달에 한 명 꼴로 퇴사를 했을만큼 사람이 많이 바꼈고, 결국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신 그 기획자분도 떠나셨다. 그 후에 10년 경력을 가진 디자이너 사수가 오신 적도 있는데 그 분도 얼마 안 가 퇴사하셨다. 하루 하루 휙휙 변하고 빠르게 여러가지 일을 쳐내야하는 환경이다보니 경력이 있는 사람들은 일해온 성향과 맞지 않으면 금방 떠나고, 신입은 자신의 필요성을 입증하지 못한다면 바로 짤리는 게 스타트업의 현실인 것 같다.


그렇게 지금은 다시 혼자서 디자인을 하고 있다. 짧은 시간들이었지만 우리 회사를 거쳐간 사람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부분들은 최대한 배웠기에 무의미한 시간이었다고 할 순 없다. 나는 변화를 좋아하고 적응력이 빠른 편이라, 그리고 워낙 성격이 무딘 편이라서 이런 상황들을 모두 경험이라고 생각하지만 주변에서는 너 어떻게 그런 곳을 1년 넘게 다녔어? 라고들 한다. 초반에는 이렇게 일하는 게 나름 재밌어서 친구들에게 스타트업을 추천했는데 지금은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.

이왕 스타트업을 갈 거면 꼭 이건 체크해봤으면 한다.

내 가치를 알아봐주고 내 특정한 능력을 필요로하는 스타트업에 가야한다. 그 가치와 능력은 반드시 포트폴리오에 녹여져있어야 한다. 스타트업의 특성상 이것저것 남는 잡일들이 매우 많은데, 정확한 포지션이 없으면 그 모든 잡일을 떠맡게 된다. 포트폴리오가 매우 중요하고 면접때 면접관이 내 포폴에 관심이 있는지, 나의 어떤 부분이 좋아서 면접에 불렀는지 체크해봐야 한다.

변화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. 분명 일주일이 걸려 다 같이 결정한 사항인데 다음날 출근해보니 180도 뒤집혀있는 상황이 종종 있다. 그런 상황들에 하나하나 열받아 할 시간이 없다. 왜 그렇게 됐는지 납득이 된다면 바로 실행에 옮겨야 한다. 사실 난 이건 대학교때 교수님이 컨펌때마다 마음이 바뀌어 빡치지만 밤을 새서라도 해야했던 상황에 익숙했어서 괜찮은 것 일 수도 있다.

마지막으로는 스타트업이 진행하고있는 서비스가 내가 좋아하는 분야여야 한다. 솔직히 내가 대표가 아닌데도 서비스를 내 새끼라는 마음을 가지고 해야 하는데 그 서비스가 나의 관심 분야가 아니면 도저히 할 마음이 생기지 않을 듯 하다. 발전 가능성이 매우 큰 분야라면 말이 또 달라지겠지만. 나는 다행히도 지금 다니는 곳의 서비스 분야가 내 취향과 맞아 아이디어도 많이 내고 나름 즐겁게 일하고 있다.

퇴사하고싶다는 생각이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내 가치를 인정받으며 좋아하는 분야의 일을 한다는 게 참 어려운 거라고 느껴진다. 배울 수 있는 만큼, 발전할 수 있는 만큼 충분히 이 시간을 활용하며 경력을 쌓고 내 서비스를 만들 날을 기대하고 있다.